갤러리이즈는 국내미술시장의 저변확대를 위해 갤러리의 문턱을 낮추고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연중1~2회에 걸쳐 유명작가와 중진 · 원로작가들의 우수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획전시를 마련
하고 있습니다.
 
갤러리이즈 기획초대 '김 현 정 - 내숭놀이공원'
2016.03.16 - 2016.04.11
제 1, 2, 3, 4 전시장
김현정
 

[전시개요]


■ 작가 노트

놀이동산의 추억, 자아를 찾는 타임머신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마냥 놀았던 기억을 재현하고 싶다.”
중학교 미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지시로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친구가 놀이공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열변을 토하듯 전했다. 지난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라서 시험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놀이공원에서 풀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꽤나 오랫동안 그런 충동을 참아왔던 것 같다. ‘놀이공원이 뭐라고 열변까지….’ 그런데, 다른 친구들도 나와서 놀이공원에서 놀았던 사연을 이어갔다. 마치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프루스트현상처럼 우리는 그날 놀이동산의 냄새에 매료됐다.
나는 놀이동산 마니아다. 학창 시절 아버지를 졸라 연간이용권을 구입한 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놀이동산을 찾곤 했다. 놀이동산은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를 풀어줄 유일한 도피처였다. 놀이동산에 가면 말로 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가장 즐거웠던 순간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놀이공원이다.
놀이동산의 추억은 사라졌다. 요즘 어른들은 쇼핑이나 영화, 술자리를 통해 직장, 인간관계 등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를 무의식적으로 분리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행동이 나와 타인을 단절시키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너무나도 바빠서 놀이동산을 잠시라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도한 욕심은 자아를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정한 자아를 ‘놀이하는 아이’에 비유했다. 놀이의 뜻과 가치는 어린이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성인이 됐다고 마음 편하게 놀지 못하고 놀이는 어린이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진짜 내가 좋아하고 즐기고 싶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는 것은 아닐지.
어른들은 선택권을 가졌다. 놀 수 있지만 놀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틀을 깨면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놀 수 있는 게 무한정 늘어난다. 내숭 놀이공원은 잃어버렸고 앞으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숱한 놀이들에 대한 향수다.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다.
치마폭의 오묘한 비밀을 간직한 내숭녀는 나이, 장소,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제약 없이 놀고 있다. 내숭녀가 놀이동산에서만 노는 것은 아니다. 과거 동네 문방구 앞에서 즐길 수 있었던 소소한 추억들을 모두 즐기고 있다. 내가 진정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나의 놀이공원이고 내 본성 그대로 편하게 즐기는 게 진정한 자아 아닐까.
내숭 놀이공원으로 어른에게는 지난날의 향수를, 어린이에게는 현재 소홀하기 쉬운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진정성의 계기를 마련하려고 했다. ■ 김 현 정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멋을 그려내다.
 
김현정은 한국화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는 젊고 유능한 작가다. 여인을 소재로 풀어낸 작가의 작품들은 섬세한 묘사와 그 속에 녹아 있는 해학적 정서로 감탄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수준 높은 표현력과 참신한 주제에서 가히 신(新)풍속화의 전형을 만들어냈다고 할 만하다.
 
김현정의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에서 파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 파격이란 것이 우리의 전통 회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긍하고 오히려 반색을 하게 된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동서양의 기법이 모두 녹아 있다. 주인공 여성의 의상이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필치는 고려 불화의 선묘를 떠올리게 한다. 복채법(伏彩法)을 재현한 듯 은은하게 표현된 한복도 일품이다. 작가는 투명에 가까운 한복의 느낌을 배가하기 위해 비치는 한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인물과 함께 등장하는 소품들은 서양화의 극사실주의를 가져온 듯 세밀하게 표현했다. 특히 말을 잘 그리는 화가는 신기를 가졌다고 표현될 만큼 전통 한국화에서 어려운 화제(畵題)로 꼽혔는데 이 어린 작가는 신통하게도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원숙한 필력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에 매진했을지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도록에 인쇄된 그림만으로 작가의 필력을 짐작하는 것은 큰 손해라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라도 건네야할 것 같은 실물 크기의 작품을 눈앞에 대하고 나서야 그 세밀한 표현과 은은한 느낌을 온전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파격 또한 흥미롭다. 한복을 입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인 여인은 전통 사회가 으레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복장이 암시하는 규율이나 의례, 태도 등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말 위에서 전력질주를 하는가 하면 강한 남성들의 전유물로 유명한 모터사이클, 할리 데이비슨에 올라타기도 한다. 과감하고도 솔직한 욕망 노출에 평소 내숭(?)을 입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현정 작가의 작품에 보이는 유머와 파격은 선배 풍속화가들의 넘치는 해학과 풍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양반 사내들이 기생들을 말에 태우고 꽃놀이 가는 모습을 그린 신윤복(申潤福)의 <연소답청(年小踏靑)>이 그 중 하나다. 조선시대의 규범은 유독 엄격하여 말은 신분이 높은 사람만 탈 수 있었는데 가장 천한 계급의 하나인 기생들이 말을 타고, 양반 남자들은 걸어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격이었을 것이다. 법은 엄격했으나 실상은 자유롭고, 문란하기까지 했던 사회를 당시 풍속화가들은 신랄하게 그려냈다. 그들의 그림은 비난이라기보다 서구의 르네상스 운동처럼 ‘이것이 풍류를 즐기는 인간다운 삶이다.’라는 외침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김현정의 작품도 그렇다.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한 순간 불편한 마음이 들게도 하지만 그런 자신을 조금은 이해하고 도닥여 준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에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동시대인들의 고독이나 상처를 감싸주는 힘이 분명히 있다.
특히 여인과 말을 함께 등장시킨 작품, <달려가마(馬)>, <여자는 말(馬)이죠>, <썸마(馬타)임>, <축하한다는 말(馬)>, <산타말(馬)이야>, <내숭 낙원>은 대부분 혼자 있는 여인만 그리던 작가에게도 ‘관계’에 대한 성찰을 더욱 깊게 만든 변화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먼저 <달려가마(馬)>는 전통 회화에서의 주마도(走馬圖)를 모티프로 했다.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할 때 네 발이 공중에 뜨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옛 기마인물도는 점잖은 양반이나 귀족 남성들이 우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은 사냥 혹은 전쟁 장면으로나 재현되었다. 그래서 여인과 말이 조우하는 <달려가마(馬)>는 신선한 인상을 준다. 꿈틀대는 근육과 숨이 차서 콧구멍이 크게 확장된 경주마의 모습에서는 응축된 에너지와 긴장감이 느껴진다. 반면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탄 여인의 풍선처럼 부푼 얇은 치마는 금방이라도 하늘 위로 떠오를 듯하다. 대비되는 두 대상의 숨막히는 일체감은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여자는 말(馬)이죠> 역시 독특한 기마인물도다. 커다란 백마는 눈앞의 홍당무에 정신이 팔려  있고 그 위에 올라탄 여인은 아래에 놓인 구두와 백(bag)을 향해 몸을 돌려 손을 뻗고 있다. 승마 중에 가당치 않은 신과 가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작품 제목처럼 ‘여자는 말이죠’라고 당위성을 귀엽게 호소하는 모양이다. 작품 속 여인의 신발은 작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기호와도 같다. 색이나 문양은 전통 꽃신인데 서양 여성들의 힐처럼 굽이 높다. 한국화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 아름다운 것이면 외부의 것이라도 흔쾌히 수용하는 그녀의 높은 자신감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작품 <축하한다는 말(馬)>은 말과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인마도(人馬圖) 도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이 물가에서 말을 씻겨주는 세마도(洗馬圖)부터 말을 끌고 가는 견마도(牽馬圖), 좋은 말을 살펴보고 고르는 상마도(相馬圖) 등의 옛 그림에서 말은 사람을 상징했다. 관리로서의 자질을 닦고, 인재를 발탁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축하한다는 말(馬)>에 등장하는 조랑말도 단순한 운동용 말이 아니라 주인공의 친구다. 정작 조랑말은 생일 선물인 안장보다 케이크 위의 홍당무에 관심이 쏠려있어 친구를 자신과 같은 마음의 눈높이로 바라본 작가의 시선에 미소를 짓게 된다. 작가는 사람과 말을, 충(忠)으로 요약되는 수직적 관계에서 마음을 나누는 벗(友情), 즉 수평적 관계로 끌어올림으로써 전통적 인마도의 변주를 꾀했다.
<썸마(馬)타임> 속 여인은 포니와 함께 수박과 선풍기만으로 더위를 이기며 조선시대 유일한 피서법이던 미역과 나무 그늘, 부채만큼이나 소박하지만 멋진 풍류를 보여준다. 저고리와 선풍기는 수박의 초록과 빨강을, 포니는 갈색 수레와 색상을 맞춘 작가의 세밀한 미감도 볼거리다.
<산타말(馬)이야> 역시 개성이 넘치는 인마도다. 작품 속의 여인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새침하여 그 마음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예수의 어머니이자 자비와 은총의 상징으로 일컫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와 같은 발음의 제목으로 보아 작가가 산타클로스처럼 나눔의 기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작품 <내숭 낙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작품,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문인화의 정수라 찬미하는 <세한도>를 드러내놓고 차용한 젊은 작가의 기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작품을 들여다보니 동양화를 깊이 공부한 작가가 추사의 정신이나 역사와 시대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작가는 겨울 풍경 같은 추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이다. 자신의 고독과도 비슷한 빛깔을 발견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세한도 안에 그려진 여인들은 말을 타고 운동도 하면서 온기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사람들이 북적이니 차가운 겨울 벌판도 제법 낙원이라 불릴 만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깐깐한 추사도 까마득한 후배의 재치 있는 오마주(hommage)에 미소 짓고 있을 것만 같다.
김현정 작가의 작품들은 현대사회와 고독을 표현했던 20세기 후반 미국 작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를 떠올리게 한다. 여인들의 화려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 한편에 드리워지는 쓸쓸함과 애잔함 때문이다. 그래서 내숭놀이공원 전에 소개된 말과 여인 시리즈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인물 곁에 ‘말’이라는 보드라운 생명체를 그려 넣으며 작가도 분명 따뜻한 위안을 느꼈으리라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밖에도 <취향저격>, <생활의 달인> 등 새로운 작품들이 다수 소개된다. 해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표현력과 한층 더 깊어진 여유를 발견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글을 맺으며 김현정 작가가 아이돌 화가라는 화려한 타이틀의 부담감이나 스포트라이트 뒤의 공허함을 털어내고 작품 속 여인처럼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운 한국화의 힘을 더 넓은 무대에 펼쳐주길 기대해본다. ■ 말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정희